공자가 주역을 썼을까: 공자와 십익, 그리고 위편삼절
2026년 10월 24일 업데이트
아닙니다. 주역의 핵심, 곧 괘사와 효사가 달린 64괘인 『주역』은 공자가 태어나기(전통적으로 기원전 551년) 전부터 쓰이고 있었습니다. 전통이 공자에게 돌린 것은 점서를 철학적 경전으로 바꾼 해설인 십익(十翼)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대부분 그것도 의심하지만, 십익이 유가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점과 공자가 아마 이 책을 공부했으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가장 이른 자료부터 오늘날까지, 근거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전통적인 이야기
고전적인 기록은 기원전 100년 무렵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공자 전기에 있습니다.
孔子晚而喜易,序彖、繫、象、說卦、文言。讀易,韋編三絕。
"공자는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차례 지었다. 역을 읽어 죽간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마지막 이미지인 韋編三絕(위편삼절)은 부지런한 공부를 뜻하는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훗날 『한서』의 서지(漢書藝文志)는 저자 문제를 한 구절로 정리했습니다. 人更三聖,世歷三古, "세 성인이 세 시대를 거쳤다"는 것입니다. 복희가 팔괘를 그렸고, 주나라 문왕이 이를 겹쳐 64괘로 만들고 괘사를 지었으며(효사는 흔히 주공에게 돌립니다), 공자가 십익을 지었다는 것이지요. 약 천 년 동안 이것은 그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공영달이나 정이 같은 주석가들은 십익을 공자의 말로 읽었습니다.
논어는 실제로 무엇이라 하나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論語)는 역을 드물게만 언급합니다. 유명한 대목은 7편(述而)에 있습니다.
子曰:加我數年,五十以學易,可以無大過矣。
"내게 몇 해를 더 주어 쉰에 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직접적인 증거처럼 보이지만, 본문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논어』의 초기 이본인 노론(魯論)은 지금 전해지는 본문의 易(역) 자리에 亦("또한")을 썼는데, 그러면 문장은 "……쉰에 배우게 한다면, 또한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정도가 됩니다. 두 글자는 소리가 비슷했습니다. 어느 쪽이 원래 읽기인지 학자들의 의견은 여전히 갈리며, 이 대목에는 역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대목인 13.22는 더 확실합니다. 공자는 제32괘 항(恆)의 3효, 不恆其德,或承之羞, "그 덕을 한결같이 하지 않으면 혹 부끄러움을 당한다"를 인용하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不占而已矣, "점칠 것도 없을 따름이다." 이 효는 신탁이 아니라 도덕적 지혜로 인용됩니다. 예언이 아니라 윤리를 위해 역을 읽는 이 태도가 바로 십익이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마왕퇴 「요」
1973년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68년에 봉인된 마왕퇴의 무덤을 열어, 『주역』 백서와 함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해설 몇 편을 찾아냈습니다. 그 가운데 「요」(要, "요점")라는 글이 공자와 역의 관계를 자세히 그립니다.
거기에는 夫子老而好易,居則在席,行則在囊, "선생님은 늙어서 역을 좋아하여, 집에 계실 때는 자리 곁에 두고, 다니실 때는 자루에 넣어 다니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제자 자공이 반문합니다. 점에 기대는 자는 덕이 부족하다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느냐고요. 공자는 점을 맨 뒤에 두고, 이 책의 "덕과 의리"(德義)를 찾는다고 답합니다. 그는 조정의 점복관들과 같은 길을 걷지만 다른 곳에 이른다(同塗而殊歸)고 말하고, 역 때문에 후세 학자들이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요」가 공자가 무언가를 썼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나라 초기, 아마 그보다 이전부터 사람들이 역에 몰두하며 그 도덕적 읽기를 변호하는 노년의 공자 이야기를 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경문의 저자 문제까지는 아니어도, 사마천이 그린 인물상을 뒷받침합니다.
의문들
의문은 현대 학문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는 『역동자문』(易童子問)에서 계사전, 문언전 등 십익에는 한 사람의 저자라면 만들지 않았을 모순과 중복이 있으므로, 모두 공자의 저작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뒤의 주희는 전통적인 귀속을 대체로 유지하면서도, 『주역』은 무엇보다 먼저 점서이며 십익 이전에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주희와 주역본의).
20세기의 "의고(疑古)" 운동은 더 나아갔고, 지금 대부분의 학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 『주역』은 공자보다 몇 세기 앞선 서주 시대에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문왕과 주공에게 돌리는 것은 전설입니다.
- 십익은 전국 시대에서 한나라 초기에 걸쳐 여러 사람이 썼습니다. 子曰("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대목은 받아쓴 것이 아니라, 후대 유가가 공자에게 돌린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 공자 자신은 아마 역을 알았고, 그것으로 가르쳤을 수도 있습니다. 『논어』는 그가 도덕적 의미로 효사를 인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요」를 비롯한 후대 전통은 그를 노년에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각 익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고, 공자 학파의 역할을 더 크게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자가 지금 형태의 십익을 썼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이유
공자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더라도, 유가의 읽기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주역을 빚었습니다. 모든 괘의 대상은 "군자(君子)는 이를 본받아……"로 끝납니다. 이미지에서 끌어낸 도덕적 조언입니다. 군자는 누구인가를 보세요. 문언전은 건괘의 첫 말인 元亨利貞을 네 가지 덕으로 읽습니다(원형이정). 왕필, 정이, 빌헬름 모두 순수한 징조 읽기가 아니라 이 "의리(義理)"의 길을 따릅니다.
유가의 방식으로 점괘 읽기
저자 문제를 결론 내지 않아도 그 태도는 빌려 쓸 수 있습니다.